젊은 날에 영혼을 울린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한 권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었다.
다 읽었다.
그 소설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상이다.”
알은 알로 있는 한
새는 없다.
나는 그 말에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
그러한 경지가
인간에게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또 한권의 책은 타고르의 기딴잘리였다.
1번의 시를 읽는데
“갈대피리”란 단어를 접하고
더 이상 읽지 못했다.
세월은 흘러 서울역 앞
아름다운 대기업 사옥에서 근무했다.
믿음이 가는 분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이 직업을 계속 가져도 될까요?”
그분의 답은
손가락까지 튕기면서
“아니요.”
남산의 국립국악원으로 가서 단소를 배웠다.
단소를 들고
나는 떠날 것이다.
나도 모르는 곳으로.....
수덕사로, 강원도로, 제주시로, 서귀포로, 부산으로,
창원으로, 다솔사로, 송광사로, 인도의 뉴델리로, 알란
디로, 이가따뿌리로, 뿌네로, 봄베이로, 브린다반으로,
아루나짤라로, 오로빌로, 타고르 마을 샨띠 니께딴으로,
꼴까따로, 하리드와르로.
하리드와르의 갠지스강가에서
어느 분이요
저를 사라지게 한 뒤
무엇을 보여주셨어요.
여정을 서둘러 멈추고
일터로 돌아왔다.
이제는 은퇴하고
시골집에서 기거한다.
붉은 파인애플 세이지의 꽃들이
만발한 공터에 앉아
기딴잘리를 마저 읽다가
나의 기딴잘리를 만들고 싶었다.
2020년 11월
젊은 날에 영혼을 울린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한 권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었다.
다 읽었다.
그 소설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상이다.”
알은 알로 있는 한
새는 없다.
나는 그 말에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
그러한 경지가
인간에게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또 한권의 책은 타고르의 기탄잘리였다.
1번의 시를 읽는데
“갈대피리”란 단어를 접하고
더 이상 읽지 못했다.
세월은 흘러 서울역 앞
아름다운 대기업 사옥에서 근무했다.
믿음이 가는 분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이 직업을 계속 가져도 될까요?”
그분의 답은
손가락까지 튕기면서
“아니요.”
남산의 국립국악원으로 가서 단소를 배웠다.
단소를 들고
나는 떠날 것이다.
나도 모르는 곳으로.....
수덕사로, 강원도로, 제주시로, 서귀포로, 부산으로,
창원으로, 다솔사로, 송광사로, 인도의 뉴델리로, 알란
디로, 이가타푸리로, 푸네로, 봄베이로, 브린다반으로,
아루나찰라로, 오로빌로, 타고르 마을 샨티 니케탄으로,
콜카타로, 하리드와르로.
하리드와르의 갠지스강가에서
어느 분이요
저를 사라지게 한 뒤
무엇을 보여주셨어요.
여정을 서둘러 멈추고
일터로 돌아왔다.
이제는 은퇴하고
시골집에서 기거한다.
붉은 파인애플 세이지의 꽃들이
만발한 공터에 앉아
기탄잘리를 마저 읽다가
나의 기탄잘리를 만들고 싶었다.
2020년 11월
슈퍼에서 파를 사온다면 흙을 떨어내야 하고 뿌리를 자르고 누런 잎들은 벗겨내야 한다. 또 쓸모없을 것 같은 부분의 잎들은 잘라야 한다. 조금 더 씻어서 물에 담가두면 너무나 아름다운 그분의 작품이 된다.
이 책에서 어려운 산스끄리뜨를 우리 말로 옮기고 내용에 어울리도록 옷을 입히니 정말로 훌륭하고 향기를 지닌 책으로 그 모습을 들어낸다. 어느 성자는 말한다. 라마나는 엽서 크기에 경전을 담는다고..... 책을 좀 읽었고 또 앞선 구도의 길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올 분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슈나다스, 왜 그래요. 이것을 보세요.” 그래서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질문자도 대단하지만 라마나님의 답 글은 핵심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책의 정수를 알아보고는 그 작은 부담을 내려놓게 하였다.
나에게 라마나님은 늘 그러한 분이시다. 내가 모든 것을 할 것이니 그대는 노래하라는 듯하다. 그분께서는 나의 삶에 들어오신다. 자주.
젊은 시절 빠딴잘리 요가를 좀 읽은 편이다. 논문도 쓰고자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마디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내용이라 포기하였다. 지금은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책은 요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보니 그 책을 등불로 삼아 진리를 찾는 데는 많은 수고와 시행착오를 격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보인다.
찬란한 현상계를 꿰뚫어 설명하고 그 배후에 거대한 바탕으로 있는 진리를 가리키는 라마나님 특유의 간결함을 이 책에서 본다.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깊이가 있는 구도자들이고 답변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게 한다.
라마나님은 한분이시고 가르침이라는 버전은 라마나스라맘에서 출간한 것과 삿SAT에서 출간은 것이 있다. 이 두 책은 조금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똑 같다. 그래서 두 버전을 하나로 모으고 싶었다.
이러한 책이 지상에 있는 줄 모르고 수많은 경전들을 탐독하였다. 젊은 시절에 접했다면 방랑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구도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1991년 1월 1일 자 편지에 “그대는 바가바드 기따의 제18장 66 수뜨라를 가슴에 새겨라. ‘모든 다르마를 그만두고, 그냥 나를 보라. 나는 그대를 까르마가 없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슬퍼하지 말라.’ 그대가 기따를 갖고 있다면 매일 한 수뜨라를 읽도록 하여라. 그것은 그대에게 평화와 행복을 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에 바가바드 기따가 들어오게 되었다. 직장의 일을 하면서 제일 권위가 있을 것 같은 기따를 번역했다. 내가 보아도 어려운 책이다. 다음에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바가바드 기따 선집을, 그다음에는 현대 성자의 기따도 번역해보았다. 그래도 내가 늘 지니면서 귀중한 책으로 두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했다. 나는 몇 수뜨라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버전의 기따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내가 스승님의 도움으로 그때 얻은 깨달음의 내용이 궁금하였다. 그것에 대해서 스승님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였다. 물론 그 전 명상을 하다가 별난 경험을 하고 고앵까님에게 여쭈니 사마디라는 말씀은 하셨다. 다른 분들이 경험한 내용을 기술한 내용을 읽어보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여러 길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을 안내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내가 간 길을 말할 수 있지만, 그 길은 너무 쉽다. 한편으로는 너무 어려울 수도 있다. 사람에게 맞는 길을 안내하는 지식이 나는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영성에 관한 책을 구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인도와 미국으로부터 책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3천 권 이상이나 되었다.
2013년 은퇴하였다. 그러나 내가 하리드와르에서 경험한 내용을 기술한 책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거의 모든 책이 궁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책이지 않은가? 책이 많이 있다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기따를 중심으로 하여 남기고 나머지는 정리하였다. 이렇게 하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이제 나만의 깊은 독서를 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기따를 정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만의 아름다운 기따를 한 권 만들 것이다.
나는 읽다가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알면 나는 더 아는 사람이 된다. 모르는 것을 알아야 아는 사람이 된다. 여러 버전의 기따를 읽다 보면 해답이 나왔다. 찾으면 어딘가에 답은 있다.
기따 작업이 중간을 넘어서자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나는 그때쯤에는 스승님 면 전에서 내가 경험한 내용을 다른 사람이 표현한 글을 만난다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작업이 중간 정도를 넘자 참나 경험의 내용을 기술하는 문장을 접하였다. 빠라마함사 요가난다와 요기라지 슈리 슈야마짜란 라히리......... 오, Spiritual Sky......... 이 용어 하나만으로도 이분들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그냥 알겠다.
이 작업을 하다가 크리슈나의 감동적인 수뜨라를 만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며칠 동안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자주 하였던가..... 그 행복감, 그 평화로움, 그 감동...... 스승님께서 수십 년 전에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내가 일찍 이 작업을 하였더라면 수천 권의 책을 구입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성에 대한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빨리 변모되었을 것이다.
편역하는 과정에 알게 된 것을 독자를 위하여 몇 자 덧붙인다.
첫째, 기따의 매 장의 제목이 책마다 달랐다. 매 장에 하나의 이름으로 주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장의 주 내용을 찾아 매 장에다 참신한 이름을 주었다.
둘째, 매 수뜨라의 주석은 모든 책이 수뜨라 바로 밑에 해설을 달았다. 나는 매 수뜨라 자체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매 수뜨라의 단어나, 문장 바로 다음의 괄호 안에 설명을 넣었다. 초점은 수뜨라 그 자체의 이해이다.
셋째, 제1장이다. 제1장의 거의 전체가 인도의 전사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 드리따라슈뜨라, 산자야, 빤다바, 빤두, 드루빠다, 비마, 드리슈따께뚜, 쩨끼따나, 유유다나, 웃따마우자스 등.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제1장을 뛰어넘어도 좋다는 말까지 하신다. 나는 이것이 정말로 궁금하였다. 왜 신께서 장수의 이름들을 나열하셨을까? 여러 책을 읽다가 그 장수의 이름들이 우리 속에 있는 정적이거나 부적인 성격의 내용이라는 것을 접하고는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나의 의문이 녹아내렸다. 어렵던 이름이 친숙한 이름으로 변화되었다.
넷째, 제10장이다. 모르는 이름이 많이 나온다. 아디띠야, 마리찌, 루드라, 바수, 메루, 브리구, 나라다, 찌뜨라라따, 까삘라, 아난따, 쁘라흘라다. 별 의미 없는 단어인 듯 하였다. 여러 권의 책에서는 단편적으로 그 이름과 관련한 내용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빠라마함사 요가난다는 그 이름과 관련한 내용을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해주셨다. 그것이 길이 되었다.
이제는 가장 재미없던 두 장이 가장 정감이 가는 두 장으로 바뀌었다. 특히 제10장의 경우 수뜨라에 해설을 덧붙이자 페이지가 가장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간결함을 원하는 분은 해설을 건너뛰고 수뜨라만 읽어나가길 권한다.
한 수뜨라만 제대로 이해해도 그 사람은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다.
한글을 아는 아르주나에게 이 책을 드린다.
2019년 9
고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구루 파파지께서
“바가바드 기타를 읽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평화로울 것입니다.” 바가바드 기타가 나의 삶에 들어왔다. 스승님의 말씀은 말씀이 아니라 명령이시다.
몇 편의 번역본이 있었지만 나는 원서가 좋았다. 수십 권을 구입하였다. 읽을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번역하고 고치고 번역하고 고치고. 나는 신 크리슈나의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
시간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나의 성미다. 모르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35년이나 흘렀다.
우주는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신은 또 무엇인가? 진리는 우주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무엇을 해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그것들에 대한 큰 그림을 바가바드 기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전체의 그림을. 구루께서는 그것을 주고자 하신 것 같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편저를 내놓는다. 진리로 가는 길을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는 간결하고 놀라운 책이다.
2024 아쉬람에서
30대 후반에 박사학위의 논문 주제로 요가 수뜨라를 선택했다. 주
제는 잘 선택한 것 같았다. 관련된 책들도 많이 구했다. 보통의 연구는 충분한 자료가 있고 그것들을 문헌적으로 고찰하거나 실험을 하면 논문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연구가 조금 진척을 보이자, 대상으로서의 연구가 아니
라 주체의 연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인간 정신의 최고봉인 사마디에 대한 것이 주된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내용이다. 사마디도 여러 단계들이
있어서 그려볼 수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그것을 경험해보아야 옳게 전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러한 경험들을 가지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한 생애 동안의 노력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논문을 더 이상 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포기하였다.
그것이 씨앗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는가 보다. 그러다 인도의 고엥까 성자의 지도 아래 명상으로, 하리드와르에서 나의 스승님이 되실 빠빠지님의 은총으로 사마디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있은 후 많은 세월이 지나 이 책을 우연히 번역하게 되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여러 길에 대하여 다소라도 알고 가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길을 걸어본 사람이 여러 길들을 소개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난 라자 요가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다. 그래서 사마디에 이르는 자세한 과정의 내용은 잘 모른다. 이 책에서는 자유에 이르기 위한 세세한 수련들과 여러 사마디들을 너무나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경험들을 되돌아보는 기회와 여러 수련들이 인간의 마음의 어떤 내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지를 선명히 알 수 있도록 해주어서 좋았다.
요가 수뜨라를 일찍 접했더라면 이론 및 경험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들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상이 머리를 스친다.
저자들께서는 적은 단어로 많은 것들을 설명해내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신 것 같다. 아니면 겸손, 아니면 지극히 절제된 성품을 지니신 것 같다. 요가의 전체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는 책자는 많지가 않다. 특히 사마디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른 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이 책에서는 자연을 실체라고 전제하고 진행시켜 나간다. 다른 흐
름에서는 환영, 신, 혹은 신의 에너지, 신 그 자체 등으로 설명하면서 자신의 길을 설명해나간다. 그래서 요가 수뜨라와는 다른 접근의 논리를 지니신 분들은 아마 혼란이 올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모든 에너지가 하나 속으로 흡수된다. 그러면 물론 자연은 환영이 된다. 그때까지는 실체라는 견지를 결코 놓지 않고 있다.
두 번째로 여기에서는 궁극의 사마디에 이르기 위해서 낮은 몇 가
지 사마디들을 거쳐 가는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하나하나씩 밟아나가는 구도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숨에 높은 사마디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요가 수뜨라는 마음의 물결들의 정지가 목표이다. 즉 마음을 어떻
게 하는 길이다. 마음이 정지할 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을 궁극의 존재라든지, 붓다라든지, 평화라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사랑의 길이나 다른 많은 길들이 있을 수 있다.
이 길들 모두는 물론 마음의 정지를 낳을 것이다. 모든 길들은 아름답다. 그러니 자신의 기호에 맞는 길을 열렬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어느 성자는 진정한 수행은 최종적인 사마디 경험 이후에 시작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책에서 매 수뜨라의 괄호 안의 내용 중 많은 것들은 번역자가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붙인 것이며, 모든 주석들도 번역자가 단 것임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