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영화는 시작되면 곧장 앞으로만 달려간다. 이미 지나온 것, 아쉬운 것, 더 기억하고 싶은 것도 끝나기 전까찌는 되돌아봄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사진은 자유롭다. 움직이지 않는(still) 영상이기 때문에 뒷걸음질, 깊은 사색, 되돌아보기가 가능하다. 영화는 사진으로부터 태어났지만 이렇듯 사진과 다른 시간의 차원을 갖는다.
영화가 사진을 캐스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되돌아봄으로써 시간의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생의 비밀을 담고, 빠르게 변하는 시간을 포착하는 역할을 사진에게 맡긴다. 그리고 삶의 상처를 기록하게 한다.
또 사진은 시간의 얼굴이다.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절단한 실재의 파편이다. 사진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제를 바라보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깨닫게 하며 어제와 오늘을 관통하는, 시간의 징검다리다. 이것이 사진이 이 땅에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이며 영화가 사진을 캐스팅한 진짜 이유이다.
사진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딸에게 좀 더 긴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로서 그리고 좀 더 일찍 사진을 시작한 사진의 선배로서 나는 여행을 통해 생생한 삶의 의미와 사진의 의미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하여 카셀, 인스부르크, 베니스, 모나코, 니스, 칸, 아를, 아비뇽, 리용, 파리, 룩셈부르크,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여정. 유럽 5개국 13개 주요 도시를 관통하는 우리의 여행 경로는 역사상 수많은 사진가들이 꿈꿨던 길이다.
기억의 기억으로부터
반기억(counter memory)처럼 기억에 저항하는 기억이 있다. 기억을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시칠리아는 기억을 지우기 위한 여행이었다. 자신에게 기억을 잊기 위해 떠난다 했고,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 버리기 위해, 잃어버리기 위해 떠난다 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여행 내내 기억을 더 얹는 기억의 기억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김영하가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라고 했던 것처럼 시칠리아는 잊어버리기 위해, 잃어버리기 위해, 또 무엇 때문에 이전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기억하기에 참 좋은 여행지다. 시칠리아는 끝없이 길에서 길로 이어지는 길의 상념이다. 또 끝없이 뒤따르는 하늘과 구름과 바람 때문에 끝 모를 그리움에 젖는 길의 상흔이다. 또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빛의 광휘로부터, 너무 깊게 속내를 숨기는 잔혹한 어둠으로부터 자아를 꿈틀거리게 하는 길의 정령이다.
그때의 사진들을 바라본다. 그러자 또다시 소스라치듯 기억에 저항하는 기억들이 걸어나온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는지, 과연 그 길들에 섰었는지 너무도 아득하고 아득하다. 이 무수한 길의 자국들, 상처들, 상흔들, 그리움들, 말해질 수 없는 이야기들 그것들이 깊은 슬픔이 되어 한 편의 영화처럼 흘러간다. 모든 그리운 것들은 과거에 있다고 했듯이 어느새 과거가 되어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행길에 동행한 조수석 남자, 사진작가 이종구에게 감사한다. 그가 없었다면 시칠리아 어느 길에서 나는 분명히 자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시칠리아도, 여행도, 사진도, 무엇보다도 기억의 기억이 있다.
2012년 5월 해운대에서
<사진사 드라마 50>은 사진의 역사 160여 년을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하고 각색한 책이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되 드라마처럼 구성했으며 객관적 자료에 입각하되 드라마 같은 내용으로 각색한 것이다. 책에 언급된 내용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다. 단지 역사적 사건과 사건의 주체들과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론하여 쓰여졌을 뿐이다.
(...) 아무쪼록 일반 독자들까지도 이 책을 통해서 사진의 역사가 재미있는 사건의 연속이었으며,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시대적 정황과 신화의 풍경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