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홍순(洪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후(永厚)이고, 난파(蘭坡)는 호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2세(1912)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서 바이올린 수업을 시작한다. 15세(1913)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를 공부하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축하 무대에서 독주를 한다.
16세(1914)에 김상운과 결혼한다. 17세(1915)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교사로 2년간 근무한다. 18세(1916)에는 홍난파가 쓴 최초의 곡인 창가 <야구전>을 발표한다. 19세(1917)에 의학에 뜻을 두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1년 후 중퇴한다. ≪악전대요≫(박문서관), ≪명곡신집(明曲新集)≫(박문서관), ≪통속창가집≫(박문서관), ≪간이무답(簡易舞踏) 행진곡집≫(박문서관), ≪말 잘하는 사위≫(광익서관), ≪조선 정악보≫(광익서관)를 펴낸다. 20세(1918년)에 부인 김상운이 사망한다. 도쿄의 우에노(上野)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21세(1919)에 도쿄에서 음악, 미술, 문학의 예술 잡지인 ≪삼광≫(삼광사)을 창간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해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한다.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주간이 되어 음악 보급 운동을 전개한다. <서울 계신 K 형께>(≪삼광≫, 창간호), <북변잡기(北邊雜記)>(≪매일신보≫ 8월 11일∼8월 19일) 등의 수필과 단편 소설 <바람과 빛>(≪삼광≫, 창간호), 음악 평론인 <창가 유희의 교육상의 효능>(≪삼광≫ 2호)을 발표한다. 22세(1920년)에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도쿄 복학이 거절된다. 소설 ≪허영(處榮)≫(≪매일신보≫, 9월 3일∼11월 18일)을 60회 발표한다. 단편 소설 <처녀혼>(≪삼광≫, 3호)을 출간한다. 이 책 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으로 멜로디를 게재하고 김형준(金亨俊)이 작사해 <봉선화>가 탄생하게 된다. 9월 도쿄에서 ‘폴란드 고아 구제 대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이를 홍난파는 최초의 연주회라 했다. 수필 <석왕사유기(釋王寺遊記)>,(≪삼광≫, 3호), 번역 소설 <빈인(貧人)>(≪삼광≫, 3호)을 각각 발표한다.
23세(1921)에 연극단의 음악과 연출을 맡았다. 자작 소설 ≪최후의 악수≫(≪매일신보≫, 4월 29일∼6월 7일)을 쓰고, 이를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자신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24세(1922)에 전문 음악 연구 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27세(1925)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한다. 세계 명작 가곡집(연악회)을 출판한다. 28세(1926)에 일본의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한다. 세계 악성집(연악회)을 출판한다. 29세(1927)에 도쿄 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한다. 31세(1929)에 도쿄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상권을 간행한다.
32세(1930)에 중앙 보육학교 음악과 교수가 된다. 33세(1931)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가 된다.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으로 2년간의 유학을 떠난다. 35세(1933)에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된다.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하권을 출판한다. 이은상의 시조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연악회) 제1집을 발행한다. 36세(1934)에 경성보육과 이화여전 강사가 된다. 빅터 레코드사의 음악부 고문을 지낸다. 12월 27일 소프라노 이대형(李大亨)과 재혼한다.
38세(1936)에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된다.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해 지휘자가 된다. 39세(1937) 성서(成西)트리오 3중주단을 조직해 경성방송국을 통해서 실내악 발전에 기여한다. 흥사단 사건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 4개월간 수감된다. 40세(1938)에 경성 음악 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다. ≪음악만필≫(영창서관)을 간행한다. 41세(1939)에 경성 방송 관현악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한다. 43세(1941)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타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