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이자 세계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멸의 거장. “한 시대가 아닌 모든 시대를 위한 작가”로 불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읽히고 상연되며 늘 새롭게 해석되고 사랑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학은 물론, 세대와 분야를 불문하고 문화 전반에 방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1564년 잉글랜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부유한 상인이자 유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586년 무렵 고향 스트랫퍼드를 떠나, 1589년 첫 작품 『헨리 6세』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즈음부터 이미 왕실로부터 두터운 후의를 입을 만큼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계층을 가리지 않고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1600~06년경에 ‘4대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를 차례로 발표하며 세계문학의 위대한 걸작들을 남긴다. 1610년경 스트랫퍼드로 돌아가 『폭풍우』 등을 발표하며 지내다가 1616년 그곳에서 사망하고 묻혔으며, 평생 37편의 희곡과 154편의 쏘네트, 2편의 이야기시 등을 집필했다. 당대를 풍미한 극작가로서 천재적인 언어 능력과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주었고, “만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라고 일컬어질 만큼 인간에 대한 다각적이고 깊은 이해로 타계한 지 400년이 지나도록 최고의 작가로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문득 폴란드의 셰익스피어 학자 얀 코트(Jan Kott)가 생각난다. 그는 『셰익스피어는 우리들의 동시대인이라는 책을 써서 전 세계 연극인들과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을 놀라게 한 사람이다. <리어 왕>과 <한여름 밤의 꿈>의 실험적인 무대를 만들어서 현대 연극사에 새 장을 연 영국의 연출가 피터 브룩의 업적도 얀 코트의 이론적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얀 코트는 뭐니 뭐니 해도 방대하고 웅장하고 어려워서 접근하기 힘들어 보이는 세계문화의 유산 셰익스피어를 우리 곁으로 가깝게 끌어온 재능 때문에 그 빛나는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우리 동네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다.
그가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는 딱딱한 학술 강연보다는 우리나라 남대문시장을 더 좋아했다. 남대문시장의 사람들, 활력, 그 벌거벗은 삶의 소용돌이에 도취되어 떠날 줄 몰랐다. 셰익스피어가 다룬 드라마는 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언제나 국경을 초월해서 우리 주변에 손에 잡힐 듯이 깔려 있었다. 그가 한 말 가운데서 흥미로운 것은 빅토르 위고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인 위고는 1850년대 말 채널 아일랜드에 유배당한 적이 있다. 위고는 아들과 함께 어느 겨울날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그는 암담한 심정이었다. 아들도 절망적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번 유배를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위고는 대답했다. “오래 걸릴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지내시겠어요?” 아들의 질문이다. “바다를 보면서 지내겠다. 너는 뭘 할래?” 위고는 궁금했다. “셰익스피어를 번역하지요.” 아들의 답변이었다. 위고의 아들은 나중에 유명한 셰익스피어 번역가가 되었다.
얀 코트가 전해준 이 에피소드에서 내가 강하게 느낀 것은, 셰익스피어는 그 당시 위고를 껴안아준 바다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불운했던 정치적 유배는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그 바다는 지금도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변하고 있다. 각자의 현실도 변하고 있다. 위고의 현실도 변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위고가 유배된 현실 속에서는 그의 동시대인이었다. 내가 전란 중에 포탄 속에서 읽었던 셰익스피어는 나의 동시대인이었고, 나의 암담했던 현실을 비춰보는 거울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시간과 나의 현실, 이 두 시간이 서로 밀접한 정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셰익스피어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동시대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