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스크랩북을 들추어보다가 십대 초반 멋모르고 이런저런 학생잡지에 발표했던 시들을 다시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렸던 적이 있다. 누렇게 변색된 갱지에 찍힌 그 시들은 가당치도 않은 감상의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그나마 간절한 자기구원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 마저도 없었다면 나는 초췌한 내 생을 수긍하지 못한 채 어느 모서리에선가 그만 맥을 놓고 말았으리라. 비틀대고 주저앉으려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준 시에게 크게 해준 게 없어 늘 미안하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혀본 적도 없고 부드러운 황금깃털을 달아준 적도 없다. 그런데도 쓰러진 나를 일으키는 지팡이가 되고 방만한 나를 빠뜨리는 수렁이 되어주었다. 단 한사람일지라도, 나 아닌 누군가에게 나의 시가 그런 그릇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