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사문학에 대한 사유가 특히 법에, 더 넓게는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그 어떤 때보다 굳게 믿고 있다."
법철학자로서 마사 누스바움은 어째서 문학적 상상력이 우리 사회에 필수적인지를 말한다. 정의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지금만큼 간절한 적 있었던가.
2024년의 12월, 계엄 이후의 시민행동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한국의 시민사회 또한 무언가를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믿는다.
읽기와 사회 정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가야트리 스피박 또한 <읽기>에서 강렬하게 펼쳐 두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어떤 갈등에서든 폭력으로 이기는 대신 평화적인 사회 정의를 향한 의지를 갖도록 상상력을 훈련하는 것은 꾸준히 세부에 주목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이해 관계 쪽으로 유예하기를 꾸준히 훈련함으로써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겁니다." 읽기에 구원이 있다.
저자가 쓴 서문 중에서 "내 눈에는 별 어려움과 고민 없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완전히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도 글쓰기에 관한 조언은 항상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같았고, 글을 쓰는 일에 악전고투하다가 대부분 실패하는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 같았다." 부분이 좋았다. 글쓰기의 어떤… 초보적인 절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쓴 책임을 확실히 해두는 문장. 책 전반에 그 절망감으로부터 시작한 절박감이 맴돌고,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방식들에 믿음이 생긴다.
2024년 11월 4째주
어두운 시대에도 도덕은 진보한다마르쿠스 가브리엘
세상사에 지쳤고, 이 괴로움을 달랠 길이 어쩌면 꽤 오랜 시간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저 그치지 않는 비를 맞으며 계속 걷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그러나 와중에도 작은 희망은 필요하고,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이번 책은 그런 의미에서 반가웠다. 겉표지를 벗기면 속이 온통 노랗다. 보고 있으면 산뜻하니 기분 좋다.
“나는 내가 유대인이라거나 여자아이라는 것보다 노동계급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했다.” 사실 이 문장과 책소개를 보고 처음에 조금 의아했다. 비비언 고닉의 전작들에 공산주의의 흔적이 그렇게 짙게 묻어 있었던가…?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과는 결이 좀 다르고, 그래서 아마 판매가 더딘 것이겠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매우 좋았다. '로맨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그 시절 이야기도, 그걸 듣고 쓰며 조금 흥분감에 젖은 젊은 고닉도. 한국 사회의 유구한 레드 컴플렉스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의 삶과 경험을 듣는 경험은 새로웠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미와 희망의 감정에 대해서라면 그리 낯설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 보고 싶다. 희망을 이렇게까지나 부르짖는 철학서가 있었던가. 존 홀러웨이는 절박한 어조로 희망을 외치며 화폐-자본-이윤의 사슬에서 풍요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분노를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면. 좌절을 상상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일들을 헤쳐 나가는 데만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래서 먼 타국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진 않겠지만…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큰 관심이 쏟아진 해에 팔레스타인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자행되고 있는 학살엔 그만큼의 눈길이 가지 않는 건 섬뜩한 일 아닌가?
가자에선 매일 기자와 의료인과 어린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 당하고 있다. 이에 관해 여러 책들이 출간 되었는데, 이 책이 가장 쉽고 선명하게 이 학살의 맥락과 본질을 증언한다.
도시에서의 저항, 더 나아간 저항을 위한 시골행, 그리고 시골에서 발견한 새로운 저항까지 저자의 모든 저항 여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의 성실하고 부지런한 불편함이 곧 선량한 시민됨이겠지. 지방 소멸과 지역 브랜딩, 귀농, 귀촌을 말하는 모든 자리에서 이 책은 교과서로 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