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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비밀 요원" 리머스와 그가 사랑한 여인 리즈가 휘말렸던 비밀 작전. 이들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힐 수도 있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50여 년이 흘러, 노인이 된 전직 요원 피터 길럼이 런던 본부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기 전까지는. 조지 스마일리의 충실한 비서였던 시절은 뒤로 한 채 농장에서 평화로운 은퇴 생활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올 것이 왔음을 예감하고 "한때 살았던 세상"으로 향한다. 본부에 도착한 길럼은 리머스와 리즈의 유족이 정보부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내 변호사의 집요한 질문에 마음 깊이 묻어버린 수십 년 전 기억을 강제로 마주한다.
"난 너무 젊었어. 너무 순진하고, 너무 직급이 낮았어. 내 탓이 아니었어."라고 되뇌던 길럼은 인생의 전성기를 바친 정보부가 노년의 자신에게 책임을 묻자 충격에 휩싸이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작전에서 수행한 일을 샅샅이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길럼의 회고록인 <스파이의 유산>이 탄생했다. 스마일리는 정말 리머스와 리즈에게 일어날 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걸까. 각종 비밀 기록과 길럼의 소회를 통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영국 사회학자들이 "1960년대 초의 동서 긴장 상황을 명확하게 알려 주는 데는 르카레의 소설이 필요했다"라고 말할 만큼, 작가는 실제 비밀 요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담아 역사 교과서에는 쓰이지 않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던 사람들을 생생히 보여준다. '제임스 본드'의 환상을 들춰내고 국가, 이념, 조직이라는 '대의'를 위해 장기말처럼 쓰인 인간을 비추는 날카로운 시선. "그때 우리가 한 일은 무엇 때문이었나"라는 물음은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맴돈다. 대의를 수호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희생이 행해졌던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추구한 대의가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면 그 환멸과 허무는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눈먼 대의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휘몰아치는 이야기에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던 마음에 깊은 물음표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