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역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천재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 그는 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 레이 브래드버리, 어슐러 르 귄 등에게 주어진 미국과학소설작가협회(SFWA)의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받은 SF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이러한 작가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신화와 상징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는 그의 작품들은 정교하고 다층적인 텍스트와 다의적 단어 선택, 풍부한 시적 묘사 때문에 거의 번역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노바』의 한국어판 출간은 오랫동안 번역본을 기다려온 국내 SF 독자들에게 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다.
새뮤얼 딜레이니의 대표작 『노바』는 32세기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모비 딕』과 성배 전설의 모험이 펼쳐지는 스페이스오페라이다. 출간 이듬해 휴고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당시 SF 작가이자 비평가인 앨지스 버드리스가 “지금 이 소설 『노바』만 놓고 보자면 딜레이니는 세계 최고의 SF 작가이다”라고 찬사한, 오늘날 딜레이니의 최고 걸작이자 메타 스페이스오페라의 금자탑으로 회자된다.
『노바』의 플롯은 간결하지만 그것이 품은 세계관은 단순하지 않다. 작가는 과학적 상상력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 중세의 성배 전설, 타로 카드와 같은 신비주의 요소들을 소재로 삼아 다양한 실험적 기법으로 『노바』의 세계를 창조한다.
미국 뉴욕시 할렘의 부유한 흑인 지식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했지만 난독증 탓에 한 학기 만에 중퇴했고, 열아홉 살에 『앱터의 보석』(1962)을 출간하며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0년 동안 다채로운 은유와 동시대적 슬랭을 종횡무진 구사한 다중적多重的이고도 지적인 환상소설과 SF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뉴웨이브 운동의 물결이 일던 미국 SF계에서 로저 젤라즈니와 함께 최고의 신인으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SF에 주력한 딜레이니는 언어학 SF인 『바벨-17』(1966)과 신화 SF 『아인슈타인 교점』(1967)으로 2년 연속 네뷸러상을 수상했고, 1968년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금자탑으로 회자되는 메타 스페이스오페라 『노바』를 출간한다. 『노바』는 당대 백인 남성 중심의 미국 SF계에서 흑인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잡지 게재를 반려당하기도 했으나, 출간된 이후에는 휴고상 후보에 올랐으며 오늘날 SF계가 꼽는 명실상부한 최고 걸작의 하나가 되었다. 이어 딜레이니는 중단편 부문에서 「그래, 그리고 고모라」(1967)로 네뷸러상을, 피카레스크 소설 「시간은 준準보석의 나선처럼」(1968)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며 SF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1975년에 발표한 포스트모던 SF 『달그렌』은 방대한 분량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도시문학의 적자嫡子라는 주류 문단의 찬사 속에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딜레이니의 시대를 훌쩍 앞서간 문학 스타일과 지적이면서도 다면적인 접근법은 후배 SF 작가들의 귀감이 될 하나의 지표를 제공했으며, 특히 윌리엄 깁슨과 브루스 스털링을 위시한 후배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 2014년 미국과학소설작가협회(SFWA)는 딜레이니에게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수여했고, 2021년에는 인종차별 타파에 기여한 도서들에 수여하는 애니스필드-울프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딜레이니는 1970년대부터 여러 대학의 연구원과 교수로 초빙되어 SF 평론과 기호학 연구에 몰두했다. 『보석 경첩이 달린 턱』(1977)과 『우현의 와인』(1984)과 같은 일련의 문예비평서들을 통해 그는 비평가로서도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이후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교수, 템플 대학의 영미문학 및 창작 강좌의 전임교수를 역임하며 창작 활동과 후진 양성에 매진했고, 2015년 말 교직에서 퇴임한 뒤 현재 파트너와 함께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다.